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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걸음

희망에 관한 시 모음

요즘 희망의 말들이 필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짧은 시로 스스로를 북돋워주기로 했습니다. 그중, 마음에 드는 시를 소개해 드립니다.

 

 

 

오래 한 생각

                          김용택

 

어느날이었다.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나희덕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마침표 하나

                        황규관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낙타

               김진경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그런 상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을 묵묵히 가리키겠네.

섣부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겠네.

오히려 옛 문명의 페허처럼

모래 구릉의 여기저기에

앙상히 남은 짐승의 유골을 보여주겠네.

 

때때로 만나는 오아시스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막 건너의 푸른 들판을

이야기하진 않으리.

자네가 절망의 마지막 벼랑에서

스스로 등에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설때까지

일어서 건조한 털을 부비며

뜨거운 햇빛 한가운데로 나설 때까지

묵묵히 자네가 절망하는 사막을 가리키겠네.

 

낙타는 사막을 떠나지 않는다네.

사막이 푸른 벌판으로 바뀔 때까지는

거대한 육봉 안에 푸른 벌판을 감추고

건조한 표정으로 사막을 걷는다네.

사막 건너의 들판을 성급히 찾는 자들은

사막을 사막으로 버리고 떠나는 자.

 

이제 자네 속의 사막을 거두어내고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서게나.

자네가 고개 숙인 낙타의 겸손을 배운다면

비로소 들릴걸세

여기저기 자네의 곁을 걷고 있는 낙타의 방울소리.

자네가 꿈도 꿀 줄 모른다고 단념한

낙타의 육봉 깊숙이 푸른 벌판으로부터 울려나와

모래에 뒤섞이는 낙타의 방울소리.

 

 

 

 

 

새해를 향하여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이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미지수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평화

               이시영

 

내가 만약 바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저 아기다람쥐의 졸리운 낮잠을 깨우지 않으리